일본 손들어준 미국 “日, 한국 수출규제는 안보 조치”

분쟁 당사국 아닌데도 이례적 입장 표명

“수출규제=안보 조치’, 日 주장에 힘실어

스위스 제네바에 있는 WTO 본부

한국 정부가 일본의 수출규제를 세계무역기구(WTO)에 제소한 것을 두고 미국 정부가 “일본이 국가 안보를 위해 취한 조치는 WTO에서 다뤄지면 안 된다”는 입장을 밝힌 것으로 나타났다. 지난달 29일(현지시간) 스위스 제네바에서 열린 WTO 분쟁해결기구(DSB) 2차 회의 자리에서다. “한국에 대한 수출 규제는 무역 보복이 아닌 안보상 조치”라는 일본 측 논리에 힘을 실어주는 것으로 해석될 소지가 있어 논란이 예상된다.

WTO 사무국이 홈페이지에 공개한 회의록 요약본에 따르면 회원국들은 이날 일본의 수출규제와 인도의 정보통신기술 관련 관세 문제 등 4건에 대해 DSB 심의 절차를 개시했다.

‘일본 수출규제’를 제소한 한국은 “일본이 수출 허가 규정을 바꿔 해당 제품의 수출이 심각하게 제한되고 있으며 이는 상품과 서비스, 무역 및 지적재산권 보호에 관한 WTO 협정을 위반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고 소개됐다.

이에 반해 일본 정부는 “한국은 국제적으로 확립된 무기 비확산과 민감한 군사 기술 통제 체제의 근본 기반에 도전하고 있다”면서 “한국 기업들은 피해를 보지 않았으며, 일본 정부는 한국이 새로운 규정을 마련한다는 전제하에 수출 허가를 계속 내고 있다”고 주장했다.

그런데 이 안건과 관련해 한·일 두 당사국 외 발언한 것으로 소개된 나라는 미국이었다. 미국 대표는 이 자리에서 “오직 일본만이 자국의 핵심 국가 안보를 보호하기 위해 필요한 조치가 무엇인지 판단할 수 있다(only Japan can judge)”면서 “여러 WTO 회원국들이 각 국가의 안보상 조치에 (WTO 분쟁 절차로) 이의를 제기하는 데 몰두하고 있다. 이런 소송의 급증은 WTO 체제에 심각한 위협이 되고 있다”는 입장을 밝혔다. 이어 이번 제소가 “(WTO의 전신부터) 70년 이상 현명하게 피해왔던 각국의 안보 문제에 WTO를 함몰시킬 우려가 있다”라고도 했다.

국가 안보를 위해 시행한 수출 규제는 WTO에서 다루는 양자 분쟁 대상이 될 수 없다는 논리로, 표면상 일본에 힘을 실어주는 발언이었다.

이런 내용은 앞서 산업자원통상부가 29일 배포했던 보도자료에는 담기지 않았다. 산업부는 DSB 절차가 개시됐다는 사실을 알리면서 “본격적인 쟁송 절차가 진행될 예정이고, 최종 판정까지 10~13개월이 걸릴 수 있다”고만 했다.

이전에도 한·일이 과거사 문제 등 민감한 이슈로 갈등을 빚을 때 미국은 캐스팅 보트 역할을 해왔다. 이 때문에 WTO 발언만 놓고 봐선 이번 건에선 일본 편에 설 가능성 높다는 관측이 나온다.

하지만 정부는 미국이 중국과 EU 등과 무역 전쟁을 벌이고 있는 연장 선상에서 나온 통상적인 발언이라며 의미를 축소하려는 분위기다. 정부 관계자는 “미국은 유럽연합(EU)과 철강 관세 문제 등으로 WTO에 분쟁이 걸린 상황”이라며 “자신들의 제소를 위한 논리를 든 것일 뿐, 이번 사안에서 직접적으로 일본측 주장에 힘을 실어준 것이라고 볼 수는 없다”고 말했다.

미국은 최근 안보를 이유로 수입 철강에 관세를 매기고 중국 화웨이를 퇴출하는 조치를 취했는데, 이런 맥락에서 국제기구가 안보상 규제에 간섭할 권한이 없다는 주장을 한 것이란 얘기다.

그러나 WTO에서 영향력이 큰 미국이 이런 입장에 섰다는 건 한국에 결코 유리한 정황은 아니다. 한국이 승소할 수 있는 관건이 ‘수출규제=안보적 조치’라는 일본 측 주장을 깨는 것이기 때문이다.

나아가 이런 분위기가 차기 WTO 사무총장 선거에도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관측도 나온다. 일본측은 사무총장에 입후보한 유명희 산자부 통상교섭본부장에 대해 “분쟁 당사자”라며 적격성을 문제 삼고 있다.

미ㆍ중 무역전쟁 여파로 WTO 상소 체계가 사실상 마비 상태인 것도 한국에 유리한 상황은 아니다. WTO 제소 절차는 1ㆍ2심으로 이뤄져 있다. 이번에 설치된 DSB는 1심에 해당하며, 3인의 패널을 연내 선임하면 내년 중순에야 승패를 가를 보고서가 나온다.

여기에 한쪽이라도 불복하면 최종심이자 WTO 상소기구(AB)에 올라가 결론을 내야 하는데, 현재 상소 위원 3명 가운데 2명이 공석이다. 미국이 2016년부터 상소 위원을 지명하지 않으면서 기능이 멈춰있는 상태다. 수출규제 문제가 해법을 찾지 못하고 장기화할 수 있다는 의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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